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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점점 작아지는 예술감상

세상이 변하면서 예술작품 감상의 방식도 크게 바뀌었다.   예를 들어, 요새는 음악을 듣기보다 보게 된다. 유튜브 탓이다.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독주자, 지휘자의 모습을 보면서 듣는다. 그렇게 감상하면서 어쩐지 음악에 미안해진다. 멋지게 표현하면, 시청각 입체적 감상이지만, 음악의 본질인 소리에 집중하고 몰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각적 요소가 중요해지다 보니, 연주자의 패션이나 지휘자의 몸동작 같은 2차적인 것이 화제가 되기도 한다. 가령, 최소한의 옷만 입고 피아노 건반을 두들기는 유자왕이나 기도 드리듯 눈감고 지휘하는 카라얀 선생, 춤추듯 온몸을 휘두르는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   음악만 그런 것이 아니다. 유튜브나 휴대전화기 덕에 많은 것이 크게 바뀌었다. 글은 자꾸만 짧아져만 가고, 미술작품은 영상을 통해 축소판으로 보고 감상했다고 착각한다. 이건, 대형영화를 작게 축소해서 손바닥에 놓고 보거나, 음악을 연주회에서 듣지 않고 기계로 듣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미술에서 작품의 크기나 질감은 결정적 조형요소다. 무엇을 그렸고, 무슨 말을 하려는가 만큼 중요한 부분이다. 뻐근한 감동의 울림도 거기서 나온다. 작게 줄인 영상을 휴대전화 화면으로 보는 것으로는 압도적인 감동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 불가능하다. 가령,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감상할 때, 축소된 영상으로도 작품의 내용이나 작가의 발언과 제작의도 등은 대충 알 수 있지만, 원작을 보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과거 해외여행 같은 건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던 시절, 우리는 화집을 보면서 미술을 공부했다. 그것도 조잡하게 인쇄된. 그러다가 세월이 좋아져서, 화집에서만 보던 작품의 원작을 마주하는 순간의 가슴 벅찬 감동이란…. 그리고 그동안 헛알았다는 자괴감 부끄러움, 낭패감….   언젠가, 우연히 왕년의 명화 ‘벤허’를 유튜브로 봤다. 보다가 짜증이 나서 꺼버렸다. 어린 시절 극장에서 70미리 시네마스코프 대형 스크린으로 봤던 그 감동, 박진감 넘치는 전차 장면의 감동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었다. 그건 장난감 같은 작은 화면으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미술관이나 음악회에 잘 안 간다. 번거롭게 찾아갈 필요를 안 느낀다. 온 세상이 내 손바닥 안에 다 있으니까…. 라고 생각한다. 점점 작게 축소되는 세상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얼마나 더 작아지려는 걸까?   그래도 여행은 부지런히 다니고, 유명 관광지마다 인증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뉴 노마드 시대’라는 말이 생길 정도다. 자연이나 역사 유물은 당연히 찾아가서 직접 봐야 하는 대상이라고 여기지만, 예술작품은 실물을 안 봐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 참 이상하다.   점점 작아지는 예술감상 방식은 편리할지는 몰라도, 예술의 본질을 외면하는 일이다. 제대로 느낄 수 없다. 같은 돌이지만 바위와 자갈은 다르다. 자꾸만 작아지다 보면, 인간의 크기와 마음마저 쪼그라드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다.   첨단 과학기술은 인간을 변화시킨다. 옛날 영화 ‘ET’의 주인공 모습은 매우 상징적이다. 눈은 크고 이마가 툭 튀어나오고 손가락은 가늘고 길다란 모습…. 요즘처럼 손가락만 까딱거리면 만사가 해결되는 생활이 이어지면, 인간들이 그런 모양으로 변할지도 모른다. AI시대가 본격화되면 한층 더 심해질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말아야 할 가치가 있는 법이다. 장엄함, 웅장미, 숭고함, 깊이와 넓이 같은 예술의 아름다움도 그런 소중한 가치들이다.   큰마음, 깊은 울림, 향기로운 깨달음마저 쪼그라들지 않기를 기원한다. 장소현 / 미술평론가·시인문화산책 예술감상 예술감상 방식 예술작품 감상 지휘자 카를로스

2025-05-08

[문화 산책] 우주의 중심은 내가 아니다

 예술작품의 감상은 개인의 취향에 좌우된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작품이 내게도 좋은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기준이라는 것이 있을 수도 없다. 예술의 평가는 다수결이 아니다. 모든 분야가 다 그렇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가령, 지휘자 누구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나는 카를로스 클라이버(1930~2004)를 가장 좋아한다. 음악성에 대해서는 전문가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예술가로서의 인간적 매력에 반했다. 음악과 하나가 되어 춤추듯 열정적으로 지휘하는 모습이 참 좋다. 마치 모노드라마를 하는 배우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베토벤 교향곡 7번 1악장을 지휘하는 장면의 신들린 몸짓은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된다. 부럽다. 내게는 없는 부분이라서 더 부러울 것이다. 도저히 흉내 낼 수는 없지만 닮고 싶다는 생각 간절하다.   일단 매력을 느끼니 그에 대해서 이것저것 알아보게 되고, 남긴 음악도 찾아 듣게 되는데 알면 알수록 인간적 매력이 느껴지고 부러운 점이 많아진다.   “무엇보다도 그는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은 채로 자신의 마음 깊은 곳이 이끄는 대로만 살고 연주하고 싶었던, 진정한 예술가요 자유인이었다.” 박종호 풍월당 대표의 말이다.     클라이버는 최정상의 지휘자 반열에 올라 큰 인기를 누렸고 부르는 곳도 많았지만 특정 오케스트라에 매이지 않았고, 자기가 원할 때만 지휘대에 올라 원하는 곡만 연주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카라얀은 “그는 냉장고가 비어야만 지휘하러 나온다”고 말했다. 바람처럼 떠돌다가 하고 싶을 때에만 지휘대에 올랐다. 그래도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그가 남긴 음반은 많지 않다. 하지만 그가 녹음한 거의 모든 음반들이 명반이 되었다. 완벽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마음에 들 때까지 혹독하게 리허설을 거듭한 일화나 만족하지 못하면 돌연 연주회를 취소해버린 등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의 죽음도 감동적이다. 카를로스 클라이버는 전립선암으로 74세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눈 속을 헤치며 시골 산마을에 있는 클라이버의 무덤을 찾아간 박종호 풍월당 대표는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클라이버는 자신에게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자, 어느 날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이 이미 세상을 떠난 아내의 고향인 슬로베니아의 산중 마을 콘시차였다. 그는 아내의 무덤이 내려다 보이는 집을 구해서 자신의 마지막 길을 준비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스스로 곡기를 끊고 죽음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리고 운명을 의연하게 받아들였다.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묘를 모르게 해 달라는 말과 함께….”   이상이 내가 지휘자 카를로스 클라이버를 좋아하는 지극히 개인적 이유다. 세상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일에서 나의 관점이 절대적이라는 말을 달리 표현하면 “누구나가 우주가 자신을 중심으로 움직인다고 믿는다”는 말이 될 것이다.   나도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철학자이자 사상가, 시인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글에 공감한다.   “나는 관찰자가 언제나 자신을 중심에 두고 생각한다는 사실에 늘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는 언제나 호(弧)의 중앙을 향해 서 있다. 하지만 수많은 언덕에서 수많은 관찰자가 자신과 똑같이 유리한 위치에서 해 지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생각지 못한다.”-헨리 데이비드 소로.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도는 것이 아니다. 나만 옳은 것이 아니다. 세상은 결코 만만치 않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 산책 우주 지휘자 카를로스 지휘자 반열 지휘자 누구

202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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